
w. 돌체(@dpfhdfhd)

켄마는 부스스 눈을 떴다. 쿠션에 기대어 게임을 하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삐뚤게 목을 받치고 있는 쿠션을 고쳐 베고 다시 잠이 들었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잠결에 얼핏 들은 초인종 소리. 다음 날 근육이 뭉치더라도, 자는 순간의 자세만 안락하면 꿋꿋하게 자는 켄마가 눈을 뜬 건 그 소리 때문이었다. 대학 동기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그의 자취방에 찾아올 사람이라곤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중엔 주인집 아저씨도 있어서, 켄마는 어쩔 수 없이 움츠린 자세를 풀고 기지개를 켰다. 새 학년이 시작되었으니 계약 갱신과 관련해서 찾아 온 걸지도 모른다. 안개처럼 뿌옇게 깔려있던 몽롱한 기운을 걷어내고, 흐느적 자리에서 일어난 켄마는 문득 현관이 잠잠하다는 걸 깨달았다.
되짚어 보면 켄마를 깨웠던 첫 초인종 소리 이후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었다. 한 번 누르고 켄마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기엔 켄마의 움직임이 너무 느지막했다. 주인집 아저씨라면 초인종을 두어 번 더 누르며 켄마를 부르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꼬마들이 장난을 쳤을 리는 없을 테고, 어떤 사람이 호수를 착각해 초인종을 잘못 누른 채로 가 버린 걸 수도 있었다. 켄마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 사람들은 켄마를 잘 알고 있기에 켄마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기보다 일부러 더 장난을 섞어 시끄럽게 재촉할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잠에서 막 깨어난 머리를 수고스럽게 굴려가며 경우를 하나하나 따지고 있는 건, 내심 켄마가 원하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황색 반짝임이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모든 상황에 히나타를 대입해 보는 것.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히나타를 주변에 덧씌운다. 그 후 히나타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갖가지 전개를 펼쳐 본다. 원래 히나타와는 물리적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켄마는 이런 방법으로 히나타와 만나지 못하는 제 욕구를 충족하곤 했다. 비록 히나타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히나타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일은 불가능하단 걸 알지만,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쇼요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말을 할까. 히나타와 만난 이후로 계속 그래 왔기 때문에, 이젠 버릇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일과가 3년을 채워가고 있는 지금, 히나타가 도쿄로 올라왔다. 심지어 켄마와 같은 학교에 진학했다. 이젠 가상이 아닌 진짜 히나타를 자주 만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그러나 켄마의 버릇은 사라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켄마는 일부러 히나타를 피하는 중이었으니까.
켄마가 하는 시뮬레이션 게임 속엔 순수한 상황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까맣고, 뜨거운, 욕망으로 점철되어있는 늪에 히나타는 몇 번이고 끌려갔다. 아무리 그래도 가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겠냐고 누군가 타박한다면, 켄마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쇼요잖아.
긴긴 시간 깊은 갈망으로 애태워 온 상대가 눈앞에 있다면 솔직히 이성을 제어 할 자신이 없었다. 저지른다면 그 순간은 최상의 쾌감을 맛보겠지. 하지만 히나타에게 미움 받는 건 절대 견딜 수 없었다. 실패하리란 확증은 없어도 성공률은 0%에 가까웠다. 켄마는 남자였고, 히나타는 켄마를 친한 친구로서 믿고 있으니까. 켄마에겐 자신을 향해 무한히 내뿜는 신뢰의 기운을 깨뜨릴 배짱은 없었다. 그래서 피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히나타의 실루엣이 보인다 싶으면 몸을 숨기고, 매일 주고받던 연락도 거의 무시했다. 서먹해지더라도, 한 순간의 욕망에 선을 넘어 경멸을 받는 것 보단 낫다 판단했다. 그러다 보면 점차 그 상황에 익숙해져 가겠지. 쇼요라면 주위에 나 하나 멀어진다 해서 흔들리지 않을 거야.
어차피 이 문 너머에 히나타가 있을 리는 없었다. 애초에 알려주지도 않은 켄마의 자취방 위치도 모르는데, 찾아 올 가능성 따위 없었다. 그래도 켄마는 상상한다. 속에선 여전히 히나타를 절실하게 갈망하고 있으니까. 만일 이 문 너머의 상대가 쇼요였다면. 내가 보고 싶었다고 찾아와 그 햇살 같은 목소리를 들려준다면. 절로 마음이 포근해졌다.
몇 발자국밖에 되지 않는 짧은 순간, 구름 같은 설렘에 충분히 빠져든 켄마는 활짝 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보이는 건 별 하나 없이 새까만 도시의 밤하늘이었다. 아직도 겨울을 떼어 내지 못한 봄의 차가운 덩어리가 폐부에 들어찼다. 허무했다.
결국 아무도 문 앞에 없었던 상황인데도 켄마는 짜증 나기는 커녕 문을 닫는 걸 아쉬워했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생각했건만, 망상에 젖어 조금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이제 문을 닫고 이불 위로 돌아가서, 하다 만 게임을 마저 하다 다시 잠이 들면 된다. 닫자. 켄마는 현관문을 당겼다.
그 순간, 문 뒤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와 냅다 문을 붙잡았다. 켄마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흐리멍텅한 복도 조명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빛이 그의 눈앞에서 발산하고 있었다. 켄마는 연신 눈만 깜빡거렸다.
"케, 켄마! 잠깐만!"
"쇼요...?!"
"갑자기 문이 열릴 거라 생각 못해서... 헤헤, 얼떨결에 밀려버렸네.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왔어! 들어가도 되지?"
대답 대신 켄마는 몸을 틀어 길목을 열어주었다. 얼떨떨한 상태에서 히나타가 가져온 편의점 봉투들을 받아 든 켄마는 깜짝 놀랐다. 잠깐 스친 손은 마치 얼음장 같았다. 아무리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아 춥다 하더라도 정도가 심했다. 그제서야 찬찬히 히나타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딸랑 티셔츠 한 장. 켄마는 괜히 마음이 급해져 부랴부랴 테이블 위에 짐을 내려 두고 담요를 들고 와 히나타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히나타는 꽤 오래 전부터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켄마랑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어 호기롭게 술을 잔뜩 지른 것까진 좋았지만, 막상 켄마의 집 앞에 도착하니 부르기가 망설여진 것이었다. 켄마가 왜 갑자기 자기를 피하는 지 이유가 알고 싶어서 주소를 알아내 무작정 찾아왔어도,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 꽤 막막한 일이었다. 가령 자신이 무언가 잘못을 했고, 그래서 켄마한테 미움을 받았는데 그 사실을 확인 사살 당하면, 분명 견디기 힘들 것이다. 히나타는 그렇게 고뇌에 빠져 문 앞에 서 있는 것에만 30분가량을 흘러 보냈다. 초인종에는 계속 손을 가져갔다 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니 원래 몸에 열도 많고 얇게 입고 다니는 히나타여도 당연히 몸이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머리끝부터 내려오는 오한에 몸을 떨었고, 얼떨결에 초인종을 누른 것이었다. 그 뒤로 히나타는 팔딱팔딱 뛰는 손가락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반응이 더뎌져 열리는 문과 함께 밀려났다가, 급하게 닫히려는 문을 잡은 것이었다.
히나타는 안으로 들어와 켄마가 준 담요를 두르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켄마도 따라 맞은 편에 앉았다. 정적이 흘렀다.
켄마는 히나타가 진짜 제 집에 찾아왔다는 사실에 떨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나타는 켄마가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걸, 일부러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켄마의 체취가 섞인 담요가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데, 몸은 점점 더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무 말이라도 꺼내 보려 해도 입술이 바싹바싹거렸다.
나 추워하는 거 알고 담요까지 줬는데 사실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게 아닐까? 그런데 왜 날 피하는 거야. 그래, 용기 내서 물어보는 거야! 여기 오기 전에도 계속 고민했었잖아.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 설 수야 없지. 이제 고민은 그만 하자. 근데 켄마가 내가 싫어졌으니까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지금도 켄마가 날 봐주지 않으니까 심장이 막 따끔따끔거리는데 직접 말로 들으면 맨정신으로는 못 버틸 지도... 어... 이럴 까봐 사왔는데, 조금 마시고 나면 나아지겠지? 그 다음에 진솔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자고 하는 거야.
결국 히나타는 술의 기운을 빌리기로 했다. 제 손발을 꼼질거리기만 하던 켄마도 히나타가 술에 입을 가져가자 따라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
제법 많이 있었던 술들은 전부 텅텅 빈 채로 테이블 한 켠에 쌓여있었다. 둘 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강한 편도 아니었다. 히나타는 긴장한 탓에 손이 가는 대로 들이키고 보다 얼근히 취해 온몸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비교적 켄마는 멀쩡해 보였지만, 알딸딸하긴 매한가지였다.
그 동안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일단 히나타가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켄마는 히나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고, 히나타는 말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 술로 목을 축였으니까. 그마저도 다 떨어졌다. 때가 왔다. 이젠 말을 꺼내지 않으면. 히나타는 흐느적흐느적 늘어지는 몸을 끌고 켄마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켄마, 켄마아...”
켄마는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어쩐지 애교가 섞인 것 같았으며, 축 늘어진 채로 얼굴이나 귀, 목 할 것 없이 온통 빨개진 모습도 귀여웠다. 좀이 쑤셨다.
“솔직하게 말해주면 안돼...?”
“솔직하게?”
“응. 왜 나 피하는 거야? 안 피하면 안돼?”
“쇼요는 내가 쇼요를 피하는 게 싫어?”
“싫어어...”
물기 어린 목소리는 귀 뿐만 아니라 온 신경을 간지럽게 했다. 특히 아랫배가 가려웠다. 화끈화끈거렸다.
“...그럼 피하지 않으면 좋아? 다가가도 돼?”
“좋아! 나 켄마가 좋은걸... 그러니까 켄마가 나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돼?”
어느새 히나타는 켄마의 코앞까지 다가와 소심하게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다. 거기 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열기로 가득 찬 얼굴이 기습적으로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소리가 얼굴에 닿아오는 순간, 켄마는 그 자리에서 히나타를 넘어뜨렸다.
히나타는 놀란 듯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켄마의 얼굴은 무척 위압적이었다. 온몸의 털이 날을 세웠다. 안 그래도 빨랐던 심장박동 소리가 선명하게 쿵쾅거렸다. 히나타의 얼굴 위로 드리운 켄마의 그림자가 서서히 짙어졌다. 노란 머리끝이 살랑살랑 얼굴을 건드렸다. 뜨거운 손가락이 붉게 물든 뺨을 매만졌다. 움찔거리는 입술 위로, 입술이 겹쳤다. 진즉 벌어져 있는 입안으로 켄마가 들어왔다. 진한 알콜향이 퍼졌지만, 아랑곳 않고 치열을 훑었다. 말캉거리는 살덩어리를 한 바퀴 휘감고 이리저리 농락했다.
“나 안 멈출 거야.”
켄마를 감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