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 치아카(@bofyouth910)

冬
코즈메가 침묵하기 시작한 것은 초교에서 이학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말을 늦게 깨친 편이기는 했다. 만 세 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한두 마디 정도의 단어밖에는 구사하질 못했다. 그래도 차근차근 언어를 깨쳐나갔으니 큰 탈은 없이 자랐다. 그러니까 초교 이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코즈메가 초교에 입학할 당시 코즈메의 아버지는 광고회사의 디자인부서 대리였고, 어머니는 학원가에 있는 종합학원 영어강사였다. 그들이 저녁을 먹을 때 즈음에 퇴근을 하면 코즈메는 제 방 침대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 게임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오늘 학교는 어땠어? 하고 물으면 그저 그랬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이하게 여겼어야 하는 부분이다. 초교에 갓 입학한 어린아이에게 학교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는 것은, 단 한 줄이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모에게 해줄 이야기가 없었다는 것은 틀림없이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코즈메의 부모는 그가 원체 말을 데면데면 해왔다는 사실과 워낙 매사에 무신경한 아이라는 그들의 판단에 의존하기로 했다. 코즈메 켄마는 초교 입학 이후 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저 그런’ 학교생활을 영위해왔다. 그의 부모는 그보다 두 시간을 먼저 일어나서 씻고, 아침을 먹고, 그 몫의 식사 위에 랩을 씌워놓고, 사랑한다는 쪽지를 잊지 않고, 그리고 출근해서는 저녁 일곱 시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코즈메는 알람시계를 이용해 스스로 일어나고, 밥을 챙겨 먹고, 발판 위에 발돋움을 해서 설거지를 하고, 옷을 입고, 이를 닦고, 그리고 등교를 했다.
그가 따돌림을 당해왔다는 사실을 그의 부모가 알게 된 것이 일 학년 마지막 학기가 시작될 무렵. 코즈메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담임이 학부모상담을 권장하며 은근히 알려준 사실이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는 부모의 앞에서 코즈메는 눈을 내리깔고 더듬더듬 변명했다. 그치만 별거 아니었는걸. 애들이 때린 것도 아니고…… 사물함에 우유를 쏟은 것도 아니고, 혼자 둔 게 전부였는걸. 어수선하게 변명거리를 긁어내던 말투는 마지막에 아주 태연하고 대수롭잖게 변질되어, 그의 부모를 공황에 빠뜨렸다. 혼자였던 게 전부인걸. 초교에 입학한 지 일 년이 체 안 된 일곱 살짜리 어린애는 외로움을 너무 자연스레 묵인했다.
그리고 그 해의 어느 겨울날, 코즈메의 가방에서 동급생이었던 유키노 카나의 게임기가 발견되었다. 유키노는 생일선물로 부모님이 사주신 게임기가 없어졌다며 점심시간을 눈물바다로 왈칵 뒤집어놓았고, 반장의 보고로 교무실에서 급히 돌아온 담임은 아이들을 모두 책상 위에 앉혀놓고 가방검사를 실시했다. 반장이 코즈메의 가방 앞주머니에 손을 쑤욱 넣어 꺼낸 것은 까만색 신형 게임기, 코즈메는 제 것이라고 손을 내젓다가 이내 입을 벌린 채 굳었다.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반장은 뒤쪽 지퍼를 열고 코즈메의 게임기를 꺼냈다. 평소 조용하던 애의 가방에서 나온 두 대의 게임기를 보고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코즈메는 영문을 모르고 말을 더듬었다. 그게 뭐야, 그게…… 나 아니야. 그때 교실 중앙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러고 보니 쟤 맨날 게임기 가지고 놀던데!
그러자 하나 둘씩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맞아, 우리 반에서 저거 가지고 노는 앤 쟤밖에 없어. 코즈메가 훔친 게 분명해. 아니야, 처음으로 언성을 높인 코즈메의 목소리는 서른 명에 달하는 아이들의 수군거림에 쉬이 묻혀버렸다. 담임은 코즈메를 불러 교무실에 데리고 갔다. 그의 얼굴은 파도 거품처럼 발작적으로 질려있었다. 평소 코즈메를 걱정스레 눈여겨보았던 담임은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켄마, 정말이니? 선생님한테 솔직하게 말해줘.
……
네가 훔친 거니?
아니에요, 대답하려고 했지만 혀뿌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입천장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윗니는 아랫니와 끈끈하게 밀착했고, 입술은 움찔움찔 뻐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좀처럼 쏟아지질 않는 말이 구강을 맴돌며 그득 찰 즈음에 담임은 그의 손을 놓았다. 사무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마른 세수를 했다. 코즈메는 그 자리에 뿌리 내려 선 채로 교사의 절절한 한숨을 들었다.
이월까지 폭설이 이어진 이듬해의 겨울, 코즈메는 말을 잃었다.
春
코즈메는 학교를 많이 옮겼다. 점점 도쿄 외곽으로 가며 변두리로 옮기더니, 나중에는 그의 부모가 이직을 하게 되며 아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중교 졸업식이 끝나고 겨울방학 동안 코즈메 가족은 짐을 간소화하며 이사 준비를 했다. 도쿄에서는 신칸센으로 대략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걸리는 센다이의 조용한 농촌도시였다. 거기서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코즈메는 고교 진학 이후 첫 유급을 했다. 초교 고학년 때부터 현저히 낮아진 성적은 학년이 지날수록 하향선을 그렸다. 그의 부모는 그를 데리고 정신과를 찾았다. 사람 좋게 웃는 의사 앞에는 도형이 여러 개 그려진 종이, 책갈피를 껴놓은 소설 한 권, 단어카드 등이 있었다. 코즈메는 두 시간 가량 그것들로 시지각 기술과 언어능력 테스트를 봤다. 그 동안 뒤켠 소파에 앉아 그를 염려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부모는 깜짝 놀랐다. 말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코즈메가, 의사가 손에 든 단어카드를 읽은 것이었다.
의사는 오랜 테스트를 마치고 코즈메에게 실어증이 아닌 선택적 함묵증이라는 진단명을 내렸다. 종이에 프린트 되어있던 복잡한 조형물과 비슷해 보이는 코즈메의 그림과 녹음기를 보여주며 그가 꽤 훌륭한 시각 변별력과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의 함구는 뇌손상이나 신경세포의 불균형 상태에서 비롯된 결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자의적으로 말을 하지 않거나, 그가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특정한 압박을 내재한 상황이나 공간이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는 주석을 달았다. 또한 유년에 미리 설립되고 내재된 언어체계가 침묵함으로써 균형 있게 실현되지 않으며, 읽기와 말하기를 제외한 쓰기, 듣기 등의 다른 언어적 능력도 자연히 함께 퇴화할 수 있다는 염려를 덧붙였다. 그의 부모는 코즈메를 일 년 더 담당하게 된 고교 담임에게 모쪼록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며, 활달하고 수더분한 학생과 나란한 자리에 배정시켜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히나타 쇼요! 너는?
……
아, 아, 명찰에 코즈메 켄마라고 쓰여있잖아. 나 바본가 봐.
코즈메의 옆자리에 앉게 된 남자앤 얼핏 보면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발육이 더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왜소한 체구를 고수하던 코즈메보다도 더 작고 호리호리한 몸이었다. 그래도 비슷한 점이라면 그게 전부였다. 저를 쇼요라고 소개한 남자앤 말이 많았고, 걸상이 서른 개나 되는 교실을 구석구석 돌아다녔고, 조그만 몸에 밥을 아주 많이 밀어 넣었고, 점심시간이 되면 운동장 옆에 조그맣게 딸린 배구코트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과연 제 이름처럼 내리쬐는 해 덩어리 같았다. 그 덕인지는 몰라도 금해는 꽃샘추위가 금방 가셨다.
쉬는 시간이 되면 짧은 선잠을 청하거나 게임기를 두드리던 코즈메는 이따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야를 간질이는 뭔가가 있다 싶으면 쇼요였다. 한 시도 쉬질 않고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맨 앞줄에 앉는 반장에게 수학을 가르쳐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고 반대편 교실문 쪽에 앉는 이누오카 소우에게 달려가서 점심시간 때 아이스크림 내기 배구를 하자고 꼬드기기도 했다. 점심시간에 사탕봉지를 까놓고 밖을 내다보면 운동장 끄트머리 코트에 훌쩍 솟은 네트를 두고 펄쩍펄쩍 뛰는 쇼요가 있었다. 이따금 그가 옆구리에 배구공을 낀 채로 먼 곳을 내다보다가 손을 휘휘 흔들었다. 코즈메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래도 그건 저를 향한 게 아니라 운동장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일학년 농구부라든가,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이따금 쇼요는 시선에 가만 두기에 어려운 곳에 있었다. 멀리 등진 뒤통수에 더 익숙한 코즈메는 귓불 가까이에 있는 입술에 자주 경직하곤 했다. 쇼요는 최근에 점심을 먹을 생각을 않았다. 모두 교내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가고 코즈메 혼자 남아 퍽 널따래진 교실을 쇼요도 기웃거렸다. 가루 날리는 분필 몇 개를 칠판에서 분질러보고, 교탁과 창가의 아담한 분재 곁을 맴돌며 잎사귀를 쓰다듬어보다가 파도에 떠밀려오듯이 코즈메의 옆자리까지 왔다. 옆자리까지만 왔는가, 등으로, 어깨로 오고, 목덜미와 귓불로 왔다. 그거 재미있어? 귓바퀴에 떨어진 목소리에 두드리던 게임기 화면이 게임오버로 종료되었다. 코즈메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책상 밑으로 손을 가져갔다. 주먹을 꼭 쥐었다가 도로 피었다. 간신히 입을 열어 두 마디를 냈다.
밥은……
아! 배가 아파서 뭐 먹을 엄두가 안 나. 오늘은 켄마 점심 먹는 거 볼래!
……나도 안 먹어.
켄마도 탈났어?
원래 그냥……
에에, 그래도 괜찮은 거야?
쇼요가 의자를 끌어당겨 주저앉았다. 코즈메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책상 밑에 뭉쳐뒀던 손을 꺼내 다시 게임기를 켰다. 이쪽을 향한 시선이 너무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정면에서 크고 또렷한 시선은 이따금 사선에서 매꼬롬했다. 창가의 분재 잎사귀를 건드리던 손가락이 코즈메의 팔뚝을 가벼이 눌렀다. 하마터면 휠을 잘못 돌릴 뻔했다. 삐긋한 손가락을 다시 휠 위에 얹고 입술을 깨물었다. 쇼요가 곧이어 입술을 삐죽거리며 크게 앓았다. 팔을 베고 누워 말 없이 코즈메의 옆얼굴을 눈길로 쿡쿡 찔렀다.
켄마는 말을 잘 안 하니까, 머릿속에 한 번만 들어갔다 나오고 싶어.
……
켄마가 무슨 생각하는지 궁금해.
그냥……
켄마는, 켄마는,
다시 게임오버. 덥다. 코즈메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슬슬 벚나무가 개화를 하려나. 몸에 찬 열기를 따로 내보낼 때가 없으니 입을 벌리게 된다. 무언가 할 말은 없지만 소리를 내지르고 싶다. 코즈메는 아주 오래 전에 그렇게 하는 방법을 까먹었다. 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이 혀끝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쇼요가 게임기를 쥔 그의 손등에 지긋한 지문을 낸다. 켄마는, 켄마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안 궁금해?
夏
옆얼굴을 쿡쿡 찔러오던 시선이 이제는 제법 뺨을 어루만질 즈음에 매미 목청과 함께 무더위가 찾아왔다. 칠월은 금방이니까, 장마가 곧 올 거야. 애들이 그렇게 떠들었다. 쇼요는 기말고사 공부와 잦은 소나기를 핑계로 운동장 외출을 잠시 그만두고 코즈메의 옆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몽당연필이 되어도 그대로 두는 코즈메의 불쌍한 연필들을 쇼요가 직접 깎아주었다. 코즈메는 제 팔을 벤 채로 눈을 감고 있기 일쑤였다.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노곤했다. 학교 선풍기가 구형 디자인에 아주 낡은 것이라며 언제든 고장 날 것을 걱정하던 쇼요는 그 즈음엔 아예 부채 하나를 들고 다녔다. 그는 눈을 감고 엎드려 누운 코즈메의 뒷목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내고 부채질을 해주었다. 그때마다 악착 같은 매미 울음소리가 유독 잦아들고 습기에 약한 몸이 시원해졌다.
쇼요의 생일은 기말 직전에 걸쳐있었다. 코즈메는 어느 날 늦은 등교를 하고 들어선 교실이 부산스러운 것을 보고 그걸 알았다. 애들은 칠판에 커다랗게 쇼요의 이름을 써놓고 걸상 위에 선물을 그득 쌓아놓았다. 교실문 뒤에서 이누오카가 쇼요의 눈을 가린 채로 들어왔다. 그가 손바닥을 떼자마자 칠판을 가리고 있던 아이들이 교판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생일 축하해, 히나타 군! 꾸러미가 아슬아슬하게 쌓여 나뒹구는 책상 바로 옆자리가 제 자리였기 때문에, 코즈메는 담임이 들어올 때까지 사물함이 배치된 교실 뒤켠에 책가방을 끌어안고 서있었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쇼요는 부쩍 신이 난 얼굴로 코즈메를 돌아봤다. 생일인 줄 몰랐다,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노라, 그런 말들이 머리에서만 공전했다. 쇼요는 그런 잡념들을 무산시키고 전혀 딴 얘길 숨죽여 꺼냈다. 켄마는 생일이 언제야?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코즈메는 시월, 하고 얼버무리곤 말았다.
학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그들은 번호를 교환했다. 두 주간 교토에 있는 외할아버지댁에 간다며 그 동안은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울상을 짓던 쇼요 때문이었다. 신사에 가면 선물을 사오겠다고 약속한 그는 방학이 시작한 당일 밤부터 문자로 짐을 싼다느니, 심야기차로 간다느니 하며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다. 코즈메는 저녁 대신으로 뜯은 파이 하나를 입에 물고 의자 깊숙이 몸을 찔러 넣었다. 게임기를 쥐고 고갤 잔뜩 수그리고 있다가 문자가 오면 이따금 게임기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켄마는 뭐가 좋아?」
쇼요가 교토에 간 지 아홉 번째 밤에 그런 문자를 보내왔다. 코즈메는 게임기를 놓고 무슨 답장을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이건 무슨 취지의 질문일까, 이빨로 잘근잘근 곱씹었다. 글쎄, 뭐가 좋을까. 아주 분명한 것들 소수를 제외하면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많은 걸 시도해본 적도 없으니 필히 좋아하게 될 것이 있다 해도 지금 당장으론 불확실하지 않은가. 결국 쇼요가 문자를 보내온 지 십오 분만에 코즈메가 회신한 내용은 이러했다.
「게임기랑 쇼요.」
그 후로 쇼요에게서는 한참 답이 없었다. 코즈메는 다시 게임기를 붙들었다. 아까 하다 만 스테이지를 깨기로 했다. 입술까지 깨문 채로 무릎 위에 게임기를 올려두고 열심히 휠을 돌렸다. 손끝이 결결이 축축해져서 몇 번이고 휠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코끝을 찡그리곤 눈가를 벅벅 비볐다. 몇 번 더딘 손으로 공격과 수비를 바꿔 누른 탓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다시 게임오버 사인이 화면에 떴을 때, 코즈메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가 도로 뱉었다. 공기가 꿉꿉해. 그는 미적거리며 몸을 일으켜 베란다 창문을 반쯤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방으로 돌아와 침구에 몸을 내던졌다. 베개에 얼굴을 푹 묻고서는 슬그머니 밀려오는 후회를 한껏 들이켰다. 그런 말은 하지 말걸 그랬나. 이상하게 들렸을지도 몰라.
핸드폰이 몸체를 떨었다. 코즈메는 손을 뻗어 책상에 놓아둔 걸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쇼요에게서 두 통이나 와있었다. 「어어 나 선물 사가려고 물은 거였는데」, 「나 네 밤만 자면 돌아가는데 언제 만날래?」. 찝찝하게 다행이었다. 내키면 한숨 자고 저녁 때 히로세교에서 보자는 문자를 보냈다.
알고 보니 쇼요는 부적을 선물로 사오려고 했던 것이었다. 고민 끝에 가미가모진자에서 붉은 실이 그려진 인연 부적을 사왔다는데, 제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물건이었는지 내밀며 목덜미를 붉혔다. 코즈메는 다리 밑 강둑에 앉아 그것을 외투 주머니에 깊이 넣었다. 이 주 내내 조부모를 따라 신사를 돌아다니고 온천에서 목욕을 했다는 쇼요에게서 금방 휘발할 듯 은근히 머무는 찻잎 향기가 났다. 나중에 켄마도 시간 나면 가자. 거기 오미쿠지도 있고 설탕사과도 있어. 우리 부모님이 결혼하신 곳이래. 쇼요가 나뭇가지로 잡초를 긁으며 중얼거린 말에 코즈메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 기묘하게 찾아온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쇼요였다.
있잖아, 이번에 교토 가서 이모부를 만났는데 유럽에 서머타임이라는 게 있대.
유럽?
이모부는 발령나셔서 독일에서 사시거든. 이번 달에 잠깐 들어오셨어.
아아……
서머타임이 여름철에 원래 표준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을 앞당겨놓는 거라더라. 여름은 해가 기니까, 해가 떠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만든 제도래.
불편할 것 같기도……
으으으, 나도.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야 하잖아.
그걸 얼마 동안 하는데?
에, 삼월에서 시월까지였나. 내가 켄마 만났을 때부터 켄마 생일까지! 그렇게 일곱 달 동안은 햇빛을 엄청 쐬는 거지.
그럼 지금도 거기는 서머타임이겠네. 쇼요는 가보지도 못한 독일 얘기를 한동안 줄줄 늘어놓았다. 우리 나중에 독일도 가보자. 어느 샌가 약속이 교토에서 독일까지 뻗었다. 코즈메는 저도 모르게 이번에도 고갤 끄덕였다. 쇼요가 구 할을 얘기하면 코즈메가 남은 일 할을 대꾸해주는 비균형적인 대화가 오갈 동안 강변에 어린아이 두 명이 딸린 가족과 자전거 세 대가 지나갔다. 쇼요는 티셔츠 목을 잡고 늘여 학교에서도 늘 쥐고 있던 부채로 가슴팍을 부쳤다. 덥다, 고 코즈메는 생각했다. 이제 무르익은 칠월인데다가 해가 길어졌으니 당연지사. 일곱 시까지는 족히 해가 산등성이 위에 있다. 그래도 바람이 부는 강둑이 이렇게 끈적할 줄이야. 코즈메가 야금야금 한숨을 내쉬는 동안 쇼요는 이쪽을 빤하게 보며 부채를 흔들었다. 눈을 끔벅거리며 잠시 뭔가를 더듬어내더니 눈썹을 치켜 뜨며 그러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게임기 안 가지고 나왔네.
어…… 쇼요랑 얘기하러 나온 거니까.
그치만 켄마는 게임기 좋아하잖아.
나, 나만큼. 마지막 몇 마디를 더듬은 쇼요는 다시 애꿎은 나뭇가지를 잔디밭에 벅벅 그었다. 코즈메는 고개를 꺾어 쇼요를 바라보았다. 한창의 일몰로 그의 뒷덜미가 불그스름했다. 요 몇 달간 제 뺨을 쿡쿡 찌르기도 하고 가만히 어루만지기도 했던 쇼요의 시선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코즈메는 제 눈길이 닿는 그의 옆얼굴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맞아, 하고 대답해주었다. 쇼요가 화들짝 마주 돌아보았다. 속눈썹에 어둠이 내리기 전 수북이 쌓인 마지막 햇빛이 끔벅이는 눈을 따라 들썩거렸다. 그가 머잖아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켄마는 나를 좋아하는 거지?
그래.
그럼 내가 뭘 하든 날 싫어하지 않을 거야?
아마도.
내가 켄마 게임기를 함부로 갖고 논다든가.
괜찮아.
켄마한테 배구를 하자고 계속 조르면서 귀찮게 군다든가.
괜찮아.
켄마를 옆에서 빤히 쳐다본다든가.
그것도 괜찮아.
어…… 켄마한테 입맞춘다든가.
잠시 코즈메의 시선이 쇼요의 입술에서 멎었다. 다시 눈, 다시 입술. 능선이 남은 태양 한 조각을 낼름 삼켜버렸다. 수평선 끄트머리가 아득히 진분홍이었다. 널따란 쪽빛 어둠이 찾아왔다. 정수리에 내리쬐는 빛이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후덥지근하다. 아주 가까이에서 태양을 쬐는 기분이다. 코즈메는 한참 저돌해오는 시선을 마주하다 쇼요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그리고 불쑥 말했다.
난 좋아.
쇼요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코즈메는 제 손바닥 밑에서 손 마디뼈가 움찔거리는 걸 느꼈다. 해볼래? 코즈메가 속삭이자 손바닥 밑의 손이 둥글게 주먹을 쥐었다. 한참 안절부절못하던 눈이 질끈 감겼다. 그의 촘촘한 속눈썹에 아직, 간밤 눈 내린 지붕처럼 한낮 동안 자박자박 쌓인 햇빛이 구르고 있다. 눈을 찬찬히 감을 때 눈꺼풀 밑으로 일광이 스몄다. 더위와 습기를 흠벅 머금은 입술이 슬며시 부딪쳐온다. 숨결이 잦아든다. 코즈메는 뱃속이 끓고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낀다. 제 손과 포개어진 손등이 곤두서서 벽돌을 긁고 있다. 와락 끌어안고 싶으나 대신 꼼지락거리는 손 위로 깍지를 낀다. 단단히 붙들어둔다. 도톰한 입술을 물자 열린다. 축축히 혀가 섞이고 주름진 입천장이 닿는다. 인중으로 따뜻하게 들썩이는 숨 두 덩이가 뭉친다.
덥다. 서머타임인 게 분명해.
秋
켄마, 요즘 골똘해 보이네. 주말의 넉넉한 식탁에서 간만에 제대로 된 수저질을 하다가 그런 소릴 들은 코즈메는 계란국을 휘젓다 말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어머니가 한 말이었는데 옆에 앉아 장조림을 집던 아버지도 맞장구를 쳤다. 코즈메는 그들의 낯을 번갈아 보다가 괜한 장조림접시를 저 끝으로 밀어놓았다. 식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별로 그런 거 아냐. 짧게 대꾸한 코즈메는 다시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국물을 떠 마셨다.
이제 이 학기 시작인데 학교는 어때, 켄마?
……
그저 그래?
좋아.
그의 부모는 잠시 말을 잃고 코즈메 켄마의 둥그런 정수리를 들여다보았다. 두 마디를 태연히 뱉어놓은 코즈메는 두부를 젓가락으로 찢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이내 서로를 힐금 쳐다보고는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그거 참 다행이다, 그의 아버지가 저 멀리 밀어놓은 장조림접시를 가져오며 중얼거렸다.
코즈메의 생일이 다가올 즈음에 쇼요는 이누오카로부터 뜻밖의 얘길 들었다. 코즈메가 사실은 올해 입학을 한 것이 아니라 유급을 해서 일 학년을 다시 다니는 거라는 이야기였다. 우리 선배야, 선배! 이누오카가 포도알을 와작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열여섯이 아니라 열일곱인 거야? 그렇지. 이걸 왜 반 학기가 지나가도록 몰랐지? 급하게 점심을 비운 쇼요는 계단을 두 칸씩 밟아 교실로 올라갔다. 코즈메는 방학 동안 온라인에서 새로이 구매한 게임 칩을 끼우고 완전히 달라진 조작버튼에 적응하고 있었다. 쇼요는 잽싸게 옆자리에 궁둥일 붙이고는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켄마! 켄마 유급해서 나보다 한 살 많다며!
……누가 그래?
이누오카가! 여하튼 그거 진짜야?
으응.
완전 멋지다!
그게 대체 어디가 멋지단 거지. 이미 게임오버 스크린이 뜬 게임기를 내려놓고 코즈메는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이런저런 것을 생각할 때면 그는 대답 없이 미간을 모으곤 했다. 그런 코즈메를 빤한 눈으로 쳐다보던 쇼요가 덧붙였다.
켄마가 일 년 기다려준 거니까.
말을 마친 쇼요는 벌떡 일어나 창가에 다가갔다. 이제 제법 쌀쌀한 날씨에 거기 놓여있던 분재가 미니선인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차마 가시는 만져보지를 못하고 창간을 짚은 채로 고개를 요리조리 돌렸다. 코즈메는 책상에 내려놓은 게임기를 덜그럭덜그럭 만지며 눈으로 쇼요를 좇았다. 그리고 그는 한참 만에 다시 게임기를 집어 들고 깨지 못한 스테이지를 로딩했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구부정히 말았다. 입가로 아주 자그맣게 웃었다.
이제 독일은 슬슬 서머타임이 끝날 때야. 코즈메의 생일까지 사흘이 남았을 때 쇼요가 불쑥 그런 말을 했다. 그들은 방과 후 차가운 햇살이 굴러다니는 배구코트 위에 바싹 붙어 앉은 채였다. 쇼요는 가쿠란 안에 기모 후드를 입고 있었다. 뭐 받고 싶은 거 있어? 그는 허벅다리에 손바닥을 벅벅 문지르며 물었다. 코즈메는 웃옷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거 줬으니까 됐어. 정말 그걸로 됐다고? 그래.
얼마 전에 부모님이랑 센다이시 정신과에 다녀왔어. 일 년 전부터 꾸준히 다니던 곳이야. 코즈메는 기억을 더듬어 입을 열었다. 말수가 아주 많이 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답을 거르지 않게 되었다. 이전보다 문장 구사능력과 글 쓰는 속도가 늘었다는 평을 들었다.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부모님은 내가 초교를 다니며 따돌림을 당할 적부터였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보다 조금 더 유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인이란 건 늘 한 가지로 존재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돌아오는 답이 없는 대화라는 게 무엇인지를 몸소 익히고 있었던 내 자신에게도 건덕지가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의 외로움은 외부에서 나를 감싸고 내부에서 나를 메워서, 내 껍데기와 사리를 동시에 만들었던 것일 수도 있다. 외투를 여미는 코즈메의 손에 쇼요가 손가락을 맞춘다. 자그마한 손이다. 쇼요는 웃어 말한다.
켄마, 외롭지 마……
코즈메는 줄곧 외로움은 스스로 견디는 것이라 믿어왔다. 그러니 외로움을 떨치는 것도 온전히 자신의 몫일 것이다. 그는 쇼요가 제 외로움을 걷어내기 위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나는 외로워. 코즈메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제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다만 외롭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고, 그렇게 덩그러니 주어진 외로움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간직했다. 아니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언성을 높였던 머나먼 그날에 누군가 믿어주었다면, 들어주기라도 했다면, 혹은 굳어버린 혀를 움직일 수 있었다면…… 외롭다고 말했을 때 어떠한 답이라도 돌아왔더라면. 그 때, 범람하는 코즈메의 소중한 외로움들을 쇼요가 두 손으로 받아낸다. 그의 체내에 꾸역꾸역 내장되어있던 것. 한참을 들여다보고 그 덩어리를 만든 수년의 이야기들을 읽어낸다. 어려운 것은 없다. 쇼요는 다만 아주 짧은 부탁만을 전한다. 켄마, 외롭지 마.
하늘에서 떨어진 태양 한 조각 같은 애가 그러잖은가. 그렇다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지구 한 귀퉁이를 차지한 자그마한 센다이시에는 아직까지 서머타임이 작동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리도 외롭지 않다면, 이리도……